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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장씨의 유래
안동 장씨(安東張氏) 연원(淵源) 
안동 장씨의 시조(始祖)는 장길(張吉)이며, 자(字)는 영보(寧父), 호(號)는 포음(圃薩)이고, 시호(諡號)는 충헌(忠獻)이다. 후일 장정필(張貞弼)로 개명하였다. 신라 하대에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라는 직함으로 해상권을 장악하며 활약한 해상왕 장보고(張保皐)의 현손자(玄孫子,4대손)로 장보고 장군이 안동장씨의 비조(鼻祖)가 된다.. 
장씨의 기원
장보고 장군의 자(字)는 정집(正集)으로 어릴 때 이름은 궁복(弓福)인데 궁파(弓巴)라고도 하였다. 궁복이나 궁파는 이두의 한자식 표현으로 활보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장군의 아버지는 중국 절강성(浙江省) 소흥부(蘇興府) 용흥(龍興) 사람으로 당나라에서 중랑장우복야(中郞將右僕射)를 지냈으나 신라 경덕왕 (750년경) 때 신라로 귀화하였고 장군은 신라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당나라에 들어가 무령군(武寧軍)에서 소장(小將)을 지냈고,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가 되어 1만명의 군사로 당과 왜의 해상무역을 장악하며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836년 신라의 왕위계승 분쟁에서 패배한 김우징(金祐徵: 후일의 신무왕)의 세력이 청해진에 도피하여 재기를 모색하고 있을 때 838 년 다시 왕위를 둘러싼 정변이 일어나자 장보고 장군은 경주로 출병하여 김우징을 강력히 지원함으로써 신무왕(神武王)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이에 신무왕은 감사의 뜻으로 장보고 장군을 감의군사 (感義軍使)로 임명하는 한편 장군의 딸을 왕비로 삼을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신무왕이 갑자기 서거(逝去)하고 문성왕(文聖王)이 등극한 후 842년 3월 문성왕은 선왕의 약속을 이어 장보고 장군의 딸을 두번째 왕비로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중앙정부를 위협할 만큼 강한 청해진의 세력이 중앙정계로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한 조정의 귀족들이 강력히 반대하여 무산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청해진과 중앙정부 사이의 반목과 대립의 골이 깊어 가던 중 조정에서 염장(閻長)을 청해진으로 보내 장보고 장군을 암살함으로써 청해진은 붕괴되고 장군의 가신과 막료(幕)들은 원래의 활동 무대이던 당나라의 적산촌(赤山村)으로 돌아갔고 대부분의 주민들은 벽골군 (碧骨郡: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해상왕 장보고(張保皐)


 

작성중

태사 충헌공 장정필(張貞弼)

안동장씨의 시조 (安東張氏의 始祖)

시조의 초휘는 길(吉)이요, 후에 다른 나라에서 쓰던 이름으로 공을 높이는 것은 의가 아니라고 하여 정필(貞弼)이라 개명하셨다. 관직은 통합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統合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公信) 태사(太師) 충헌공(忠獻公)이시다.


시조께서는 888년 당나라에서 태어나 892년 부친 원(源)께서 당말의 병란을 피해 가족을 데리고 신라로 오실 때 다섯 살이었다. 처음 상륙한 곳은 명주 현강능(경포호반)으로, 후백제 견훤의 세력 확장으로 남쪽 지역이 불안하자 동해안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내륙으로 들어와 충주(중원소경) 부근에 정착하셨으며, 부친의 묘가 원주에 있다.


공은 18세에 당나라로 건너가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힘쓰셨다. 황제의 부름을 받아 성균관을 재건하고 이부상서가 되었으나, 간신의 무고로 신라로 돌아오셨다.


이후 고창으로 내려가 김선평, 김행 공과 교류하였고, 930년 1월 병산대첩에서 고려군을 승리로 이끌어 후백제 몰락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왕건은 김선평에게 대광, 장길과 김행(권행)에게 대상 벼슬을 내리고, 안동을 식읍으로 주었다.


시조께서는 이후 고려 왕실을 도우시다 91세로 향수(享壽)하셨다.

삼태사묘와 삼태사 이야기
안동태사묘(安東太師廟)
태사묘(太師廟)는 안동시 북문동 24-1번지 1229평(坪) 대지에 삼태사(三太師) : 김선평(김선평:성주), 권행(權幸:本新羅宗姓金), 장정필(張貞弼:初名 吉 ) 공(公)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천여년이 넘도록 향사(享祀)를 봉행(奉行)해온 태사묘우(太師廟宇)를 비롯하여 보물각(寶物閣)과 숭보당(崇報堂), 동·서재(東·西齋), 경모루(景慕樓), 전사청(典祀廳), 차전각(車戰閣), 안묘당(安廟堂), 주사(廚舍)등 10동(棟)의 건물이 기념물(記念物) 제15호로 지정되고, 고려때 유물(遺物) 11종 21점은 보물(寶物) 제451호로 지정되어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로서 안동을 상징하는 역사적 유적(遺蹟)이다.[보물각 태사묘 삼공신유물(寶物閣 太師廟 三功臣遺物)]
삼태사(三太師)와 병산대첩(甁山大捷)
신라말 귀족의 왕위 쟁탈로 왕권(王權)이 약화되자 9세기에 이르러 후백제의 견훤(甄萱)과 고려의 왕건(王建)은 신라의 영토를 쟁취(爭取)하기 시작했다.
후백제 견훤(甄萱)은 신라의 여러성을 쟁취(爭取)하고 929년 고창군(古昌郡)을 침략하려고 석산(와룡면서지.절골 앞산)에 진을 치고 927년 동수(桐數:팔동산)싸움에서 크게 패한 고려 왕건(王建)은 군사를 정비하여 병산(甁山: 와룡면 서지. 절골 뒷산)에 대치하니 그 거리가 500보 정도였다.
이때는 삼태사(三太師)의 향배(向背)에 따라 승패(勝敗)가 좌우되는 시점인데 태사공(太師公)들은 왕건(王建)을 돕기로 협의하고 930년 고려를 도와 협공(挾攻)하자 견훤군(甄萱軍)은 군사8000여명을 잃은 후 패하고 도주하였다.
이때 안중(安中)할머니가 몰래 고삼술을 빚어 견훤(甄萱)의 군사들에게 권하여 만취(滿醉)케 하고 삼공신군(三功臣軍)에 알려 급습(急襲)으로 승리(勝利)할 수 있게 하였다는 설(說)이 전(傳)하고 있다.
병산대첩(甁山大捷)에서 대승하자 인근 30여 고을은 물론 신라 동북쪽 여러 성주(城主)가 고려에 귀부(歸附)하였으며 신라 경순왕(敬順王)은 935년에 고려에 투항(投降)하고 후백제는 부자간(父子間 왕권(王權) 싸움으로 936년에 고려에 멸망하니 후삼국은 통일(統一)되었다.
삼태사(三太師)와 안동(安東)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삼공신(三功臣)에게 병산대첩(甁山大捷)의 공(功)으로 삼한벽상삼중대광아보공신(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의 직위를 제수(除授)하고 이어 태사(太師)에 오르게 하였다.
그리고 고창군(古昌郡)을 부(府)로 승격시키고 동국(東國)을 안전케 했다는 뜻으로 지명(地名)을 안동(安東)으로 고친 후 삼태사(三太師)의 식읍(食邑)으로 내리니 안동(安東)을 본관(本貫)으로 한 삼성(三姓), 김(金)·권(權)·장(張)씨가 생기고 삼태사공(三太師公)들은 각성(各姓)의 시조(始祖)가 되니 안동(安東)은 유서(由緖)깊은 도시로 오늘날 안동문화권(安東文化圈)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태사(三太師)의 위패(位牌)와 배향(配享)
고려시대는 삼태사(三太師)의 위패를 부(府)의 삼공신묘(三功臣廟)에 모시다가 조선중종(中宗)때부터 이곳 태사묘우(太師廟宇)에 모셔왔다.
[삼태사묘(三太師廟)의 위패(位牌) :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우신 안동권씨의 시조 권행(權幸), 안동김씨의 시조 김선평(金宣平), 안동장씨의 시조 장정필(張貞弼)등을 제향하는 사당이다.]
조선 광해군(光海君)(1608)때에 삼성(三姓)의 대표 권함(權諴) 김태(金兌) 장흥효(張興孝)가 합의(合議)하여 위패(位牌)를 세분이 같게 삼한벽상삼중대광아보공신(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으로 고쳐 성(姓)고 휘(諱)만 다르게 개제주(改題主)하여 권오(權晤)가 써서 나란히 모시고 있다.
조선선조(宣祖) 임진왜란(1592~1598)때 묘직인 안금이(安金伊)가 삼태사(三太師)의 위패(位牌)를 길안면 국란(菊蘭) 계곡 동굴로 모셔 가서 봉향(奉享)하다가 평란(平亂)후 환안(還安)하였다.
이에 안묘당(安廟堂)을 지어 안중(安中)할머니는 달리는 백마(白馬)를 그려 전승(戰勝)을 상징(象徵)하고 안금이(安金伊)는 위패(位牌)로 모시고 삼태사(三太師) 향사시(享祀時)에 마련된 음식으로 잔(盞)을 올려 그들의 공(功)을 기리고 있다.
6.25동란(1950~1953)때는 유사(有司) 장봉섭(張鳳燮)이 생명을 걸고 폭격속에 들어가 삼태사(三太師)의 위패(位牌)를 모셔와 성곡동 장(張)씨의 광풍정(光風亭)에 안치하였다가 다음해 능동권(權)씨의 보판각(譜板閣)으로 옮겨 모시다가 동란 후 1958년에 태사묘(太師廟)가 완공(完工)되고 환안(還安)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향사(享祀)는 고려성종(成宗)(983년)때부터 삼공신(三功臣)의 공덕(功德: 전쟁의 禍免·郡을 府로 승격)을 추모하여 부(府)에서 부리(府吏)의 주관 하에 부사(府使)와 부민(府民)들이 함께 제향(祭享)하다가 점차 후손들이 맡게 된 것으로 보며 조선시대부터는 유교적 의례(儀禮)로 체계(體系)를 잡게 되자 명종 때부터 4절사(節祀)(정조.단오.추석.동지)에 제향(祭享)하다가 선조(宣祖)(1585)때부터 삼성(三姓)이 의론(議論)하여 춘추중월(春秋仲月)인 음력 2·8월의 중정(中丁)일에 향사(享祀)를 모시며 헌관(獻官)은 삼성(三姓:金.權.張)에서 윤번(輪番)으로 선임하여 봉제(奉祭)하고 있다
태사묘(太師廟)의 건립(建立)과 관리(管理)
고려성종(成宗)(983년)때 부민(府民)들이 정성을 모아 부(府)내에 사당(祠堂:三功臣廟宇)을 지은 것이 태사묘(太師廟)의 시작이며, 조선11대 중종(中宗)(1542)때 강릉인 김광철(金光轍)부사(府使)가 삼공신묘우(三功臣廟宇)를 현 위치로 옮기고 15대 광해군(光海君) (1613년)때 권반(權盼), 권태일(權泰一)이 삼성(三姓)의 후손들과 함께 성금(誠金)을 모아(이때 14개군 참여) 현재규모(現在規模) 중건(重建)하고 태사묘(太師廟)로 개칭하였다.
임진외란때와 20대 경종(景宗)(1721년)때의 큰 화재(火災) 그리고 6.25동란 때 등 태사묘(太師廟)는 세 번이나 전소(全燒) 하였으나 위패(位牌)는 그 화(禍)를 면하였고, 그때마다 후손들이 성금(誠金)을 모으고 부(府)와 국가(國家)의 보조로 재건립(再建立)하였고 현재의 건물(建物)은 6.25동란 후 1958년에 준공(竣工)하였으며 보물각(寶物閣)과 경모루(景慕樓)는 1963년에 증축(增築)하였다.
태사묘(太師廟)관리(管理)는 처음에 부리(府吏)가 맡아 한 것으로 보며 다음은 후손(後孫)들이 맡았으며 현재는 삼성(三姓)에서 관리위원 각7명씩을 선임하여 총21명이 향사(享祀)를 비롯한 재정(財政). 건물(建物). 토지(土地)등을 총괄 관리한다.